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자 지구 (문단 편집) === 헬레니즘 도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가자 신상 1.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가자 신상 2.jpg|width=100%]]}}} || ||<-2> 제우스 석상과 아폴로 청동상[* 고대 가자의 그리스 주민들은 아폴로를 도시의 주신으로 삼았다.] || 이렇게 가자 원주민들을 일소한 알렉산드로스는 현지 베두인들을 데려와 정착시켰고, 폴리스 지위를 주었다. [[디아도코이]] 시대에 들어 가자는 본래 안티고노스의 수중에 있었으나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셀레우코스 1세 연합군이 43마리의 코끼리를 대동한 왕자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하였다. 그 후 가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이라크 기반 [[셀레우코스 왕조]] 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한 [[시리아 전쟁]]에서 가자는 대부분 전자의 소유였고, 기원전 27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나바테아 원정 후 도시는 남부 아라비아와의 향료 무역으로 번영하게 되었다. 앞선 가자 전투에서 정확히 한세기 후인 기원전 217년 현 이집트-가자 국경의 라파에서 벌어진 [[라피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셀레우코스 조의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안티오코스 3세는 동방 원정 (아나바시스) 후 축적한 국력을 바탕으로 재침하여 기원전 196년 가자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역을 프톨레마이오스 조로부터 정복할 수 있었다. 2세기에 걸친 헬레니즘기에 가자는 그리스 문화가 자리잡았고, 도시는 헬라 학문과 철학의 융성한 거점의 명성을 얻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셀레우코스 조의 쇠퇴와 함께 가자는 사실상 자립하였다. 그러던 기원전 103년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야네이가 [[아크레]]를 침공하자 키프로스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개입하였다. 후자가 연전연승을 거두자 그가 팔레스타인을 거점으로 다시 이집트를 노릴까 염려한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 역시 육상으로 북상하였다. 프톨레마오이오스 9세는 그를 우회하여 가자에 이르러 월동하였으나, 이집트 군대가 기수를 돌려 다가오자 기원전 102년 키프로스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한숨을 돌린 알렉산드로스 야네이는 이듬해 이집트의 태후 클레오파트라 3세가 사망하자 정복을 재개, 라피아를 점령하며 가자를 고립시켰다. 기원전 96년, 그는 가자를 공격하였다. 현지 사령관 아폴로도토스는 야습으로 하스몬 군대를 격파하였고 수천의 사상자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나바테아의 원조가 오지 않자 아폴로도토스의 형 리시마코스의 주도로 가자는 항복하였다. 도시에 입성한 알렉산드로스 야네이는 약속과 달리 공격적으로 돌변하였고, 이에 민회와 5백여 주민들은 아폴로 신전에 피신했으나 학살되었다.[* 절망한 몇몇 주민들은 노예가 되지 않도록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약탈을 막기 위해 집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령이 된 후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 의해 재건되었다. 지중해를 제패한 [[로마 제국]]의 휘하에서 가자는 팔레스타인의 주요 항구 중 하나이자 이집트-시리아 간의 내륙 무역 도시로 번영하였다. 기원전 30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도시를 [[헤롯 대왕]]에게 넘겼는데, 기원전 4년 그가 후자가 사망하자 다시 로마의 시리아 속주에 편성되었다. 사도행전에서 가자는 예루살렘에서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사막로 상에 입지하였다고 거론되었다. 서기 66년 [[유대 전쟁|유대 반란]] 시에 유대인 반군의 방화로 일부 파괴되었으나 곧 재건되었다. 반란 진압을 맡은 [[티투스]]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와 점령 후 회군할 때 모두 가자를 거쳐갔다. 2세기 로마 제국의 나바테아 병합과 함께 가자는 전통적인 [[홍해]] 교역에 다시 나서며 번영하였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500인 의회가 통치하였다. 주민들은 필리스티아, 그리스, 로마, 가나안, 페니키아, 유대, 이집트, 페르시아, 베두인 등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국제 도시였고 화폐 주조소가 자리하였다. 130년 가자를 방문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신설된 경기장에서 친히 각종 경기들을 주최하였다. 그외에 로마 시기 가자에는 토착 신인 마르나스 및 티케를 중심으로 제우스, 헬리오스, 아프로디테, 아폴로. 아테나 등을 모시는 신전들이 있었다. 로마 시대에 세워진 가자 항구는 처음에 ([[나폴리]]의 어원이기도 한) 그리스식 지명 '네아폴리스'로 불렸고,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독립된 도시로 격상되며 '콘스탄테이아'로 개칭되었다가 [[율리아누스]] 때에 '마이우마스'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간단히 마이우마로 불린 그 항구를 중심으로 가자 일대에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여타 레반트의 도시들과 달리 내륙 가자는 다신교세가 강하였고 299년에는 성경 강독을 위해 모인 기독교도들이 공격당하기도 하였다. 4세기 초엽 기독교 박해 시에 가자에선 성 실바누스와 30여 기독교도들이 순교하였다. (310년) [[밀라노 칙령]]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해안의 마이우마와 달리 내륙의 가자는 다신교 도시로 남았으며, 이에 331년 콘스탄티누스는 두 도시를 분리하고 마이우마 주교좌를 설립한 것이다. 다만 단일 총독이 통치하는 등 두 도시는 정치적으론 하나로 남았다. 4세기 말엽 기독교의 국교화 후에도 기독교도의 공직 취임을 불허하는 등 '이교' 도시였던 가자는 402년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보낸 특사 키네기우스가 시내의 8대 신전들을 파괴한 후 406년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황후의 지시로 마르나스 신전 터에 세례자 요한 성당이 건립되며 기독교화되기 시작하였다. 6세기에는 성 세르기오스 성당과 [[시나고그]] (유대 회당)이 세워졌으며, 가자는 [[시나이 반도]] 순례의 출발점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